소프트웨어 프로젝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스펙을 작성하는 일이다. 가장 어려운 것도 스펙을 작성하는 일이다.
프레드릭 브룩스는 이렇게 말했다. "소프트웨어 개발에 있어서 가장 어려운 일은 개발 자체가 아니라, 무엇을 개발할지 결정하는 일이다." 이 말은 과거에도 유효했고, 현재도 유효하고, 미래에도 유효하다.
소프트웨어 프로그래머는 인공지능으로 대체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직업이다. 하지만 소프트웨어 스펙을 작성하는 분석 아키텍트는 인공지능으로 대체될 가능성이 가장 낮은 직업 중 하나다. 아무리 인공지능이 발전을 해도 스펙을 대신 작성해주는 세상이 올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래서 스펙을 작성하는 일은 어렵지만 더욱 가치가 있다.
스펙을 잘 쓰는 방법을 정립해 놓은 것을 요구공학(Requirement engineering)이라고 한다.
공학이라고 하면 왠지 이론적인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공학은 실전에 비롯되었다. 과학을 현실에 적용하면서 과학과 현실의 간극을 메꿔주는 것이 공학이며 현실에서 벌어진 문제를 해결하면서 공학은 발전을 해 나간다. 즉, 이론적인 뒷받침도 있지만 공학은 실전이 먼저다. 요구공학도 이론적인 연구가 많이 되어 있지만 실전을 기반으로 발전되어 왔다. 하지만 현대의 요구공학은 이론적인 연구도 상당히 많이 더해져서 내용이 상당히 방대해졌다.
이런 방대한 요구공학 이론을 보고 왠만한 소프트웨어 회사에서 배우고 따라한 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피아노 백과사전을 보고 피아노를 배우는 것과 비슷할 것이다. 아직 소프트웨어 공학이 내재화 되지 않은 소프트웨어 회사에서 요구공학 이론을 적용하는 것은 의미 없는 몸부림이다. 그렇게 한다면 오히려 주먹구구식 개발보다 효율이 떨어지는 것은 시간 문제다. 실제 우리나라의 많은 소프트웨어 회사들이 겪고 있는 문제다.
요구공학 즉, 스펙을 잘 작성하는 방법은 가르칠 수는 있는데, 배울 수는 없다.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인가 할 것이다. 하지만 이를 다른 분야의 예를 들면 바로 이해가 된다. 피아노를 잘 치는 방법을 가르칠 수는 있어도 그렇게 배워서는 피아노를 잘 칠 수 없다. 골프를 잘 치는 방법을 가르칠 수는 있어도 그렇게 해서는 골프를 잘 칠 수 없다. 가르치는 것이 의미는 있지만 피아노를 잘 치고, 골프를 잘 치려면 훈련을 해야 한다. 1,2년이 아니고 수년 이상 훈련을 하면서 코칭을 해야 비로소 피아노를 잘 치고, 골프를 잘 칠 수 있다. 코딩을 배우는 것과는 매우 다르다.
그래서 요구공학 책은 많아도, 책을 보고 배워서 스펙을 작성해도 실력이 잘 늘지 않는다. 특히나 이론에 아주 충실한 책들은 아무리 좋은 책이라고 하더라도 현실에 적용하기는 더욱 어렵다. 회사 경영진들은 대부분 매우 조급하다. 꾸준히 투자하고 훈련하면 10년 걸릴 일을 1,2년 안에 성과를 내려고 한다. 피아노 1,2년 안에 늘 수 있는 실력에 한계가 있듯이 스펙을 작성하는 것도 그렇게 빨리 성과가 나지는 않는다. 서두르다가는 오히려 역효과만 난다. 그래서 많은 회사에서 스펙 작성 역량 확보에 실패한다. 그리고 해봤더니 안되더라. 요구공학은 엉터리라고 한다. 피아노 1,2년 연습하고 쇼팽의 곡을 못 친다고 실망하는 것과 비슷하다.
스펙을 잘 작성하기 위해서는 실전에 따른 노하우의 축적이 필요하다. 노하우 백과사전을 만들어서 봐도 배울 수는 없다. 노하우는 스스로 현실에서 익히는 것이다. 그래서 경험이 중요하다. 단, 잘못된 방법으로 시도한 경험으로는 좋은 노하우 축적이 안된다. 오히려 왜곡된 생각이 쌓인다. 그래서 좋은 코치가 필요하다. 코치와 같이 실전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스펙을 직접 써보고, 피드백을 받아야 한다. 피아노, 골프 모두 같은 방식으로 배운다. 스펙을 작성하는데 있어서 일반적인 코치는 회사의 고참 개발자, 경력이 많은 분석 아키텍트다. 하지만 우리나라 소프트웨어 회사에서는 그런 역량이 있는 선배를 찾아보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코칭을 제대로 받을 수가 없다.
스펙을 작성하는 기법만 알아서는 스펙을 잘 쓸 수 없다. 개발 문화, 관행, 습관, 프로세스, 원리, 원칙을 알고 접근해야 한다. 앞으로 시리즈 글에서 스펙을 잘 작성하는데 필요한 모든 분야를 다룰 것이다.
운동은 원리를 몰라도 코치가 가르쳐주는 대로 무조건 반복 훈련을 해도 성과를 내고 경지에 오를 수도 있다. 하지만 소프트웨어 개발은 원리를 모르고 기계적으로 따라해서는 제대로 발전하기 어렵다. 오히려 엉뚱한 함정에 빠져서 고치기 힘든 나쁜 습관이 몸에 베일 수 있다. 그래서 원리를 아는 것도 배우 중요하다. 그래서 앞으로 원리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많은 얘기를 할 것이다.
소프트웨어 개발은 “적절히”가 매우 중요하다. “적절히”를 제대로 이해하는데 10년, 20년 걸린다. 피아노, 골프도 마찬가지다. 처음부터 완벽하게 이해하려는 것은 욕심이다.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원리를 하나씩 깨우칠 때 “적절히” 하는 노하우를 하나씩 터득할 수 있다. 이 시리즈를 통해서 노하우를 터득해 나가보자.